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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탕수수
    카테고리 없음 2024. 2. 16. 23:46

    인간이 맛보는  맛중에는 단맛이 있습니다.

     

    단맛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겁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단맛이 주는 유혹은 거절하기 어렵죠

    단맛은 식물에서 나옵니다. 인류가  등장하면서 인류는 숲에서 생활을 해야 했고 숲과 식물이 제공하는

    과일이 주는 단맛은 아마도 최초의 단맛이었을겁니다.

    그리고 벌꿀이 있었죠.  기원전 2500년에 이미 인류는 벌꿀을 맛봤다고 합니다.

     

    인류는 계속 발전하고 진화햇습니다.

    자연이 공짜?로 제공해주는 열매가 아닌 넓은 밭과 논에서 식량을 가져오는 기술도 익혔죠.

     

    이른바 '농사'입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단맛의 원천이 바뀝니다.  바로 곡식에서 가져오죠

    곡물에서 뽑아내는 전분은 단맛의 원천이었습니다. 보리에서 나오는 맥아(麥芽 겉보리에 수분·온도·산소를 작용시켜 발아시킨 보리의 낟알)는 

    전분을 분해하는 디아스타아제(diastase)를 함유하고 있죠.  

     

    이 맥아에 전분을 합치면 전분이 분해되면서 당(糖)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맥아당입니다.

    오늘날 조미료로 흔히 쓰이는 그거

     

    단맛을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게 있습니다. 바로 설탕입니다.

    그리고 그 설탕의 원료가 바로 사탕수수입니다.  

    사실 다 아는 얘기를 좀 길게 풀어쓴거네요 ㅎㅎ

     

    사탕수수는 사이즈를 자랑하는 식물입니다.

    다 자란 사탕수수는 6m까지도 자란다고 하니 엄청난거죠. 

    이런 사이즈에 햇볕을 가득 머금은 사탕수수는 줄기에 당을 모읍니다.

     

    아열대에서 주로 재배하는 사탕수수에서 최초로 설탕을 정제하는 기술은 인도에서 나왔습니다.

    이러한 지역적인 제한은 사탕수수에서 얻은 자당(蔗糖 사탕수수, 사탕무 따위의 식물에 들어 있는 이당류의 하나. 흰색의 고체로, 물에 잘 녹으며 단맛이 난다.)은 그 지역외에서는 아주 귀한 식재료였습니다. 

    당연히 값은 매우 비쌌고 특정계층만이 즐기곤 했습니다.

     

    이러한 설탕은 인도뿐만이 아니라 세계로 퍼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전파의 매개체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었습니다.  십자군원정

     

    이러한 사탕수수는 사이즈와 재배환경( 무더위)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고생을 요구합니다.

    인류는 벼농사를 지을때 인류의 영원한 친구 소를 이용해서 땅을 갈 수 있었지만 

    사탕수수농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축을 동원할수도 없었고 새싹을 심는것부터 수확하는 모든 과정을 인류가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노동집약적인 구조는 기계가 개발되는 시점인 20세기까지 계속 이어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추가됩니다.

    사탕수수를 수확해서 설탕을 뽑아내는 과정이죠.

     

    초기에는 사탕수수를 수확할때는 밭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수분을 품고 있는 줄기는 불에도 타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운 잎을 태웠으며 벌레등을 죽이는 효과가 있었다고 하죠

    그러나 불을 지르는건 다른 문제 (화재, 탄소배출등등)가 있어서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설탕을 만들기 위한 준비작업에 불과했습니다.

     

    사탕수수의 줄기에는 설탕성분을 저장한 부분이 있습니다.

    수확이 이루어지면 그 부분은 굳어지는데 초기 농부들은 설탕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굳기전에

    가열을 해서 추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 이제

     

    사탕수수 줄기를 잘랐으니 설탕을 추출해야 합니다.

    자른 사탕수수를 묵혀 두었다가 설탕을 추출할수는 없으니 한번에 수확 -> 정제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이는 쉴틈없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을겁니다.

     

    이는 규모의 재배와 가공업으로 이어집니다.

    넓은 사탕수수밭을 만들었고 (사탕수수는 땅에는 까탈스럽지 않습니다)

    생산과 가공, 정제를 동시에 하는 큰 공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공장이 완성되어서 밭-수확-가공까지 이어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플랜테이션plantation 산업이 완성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플랜테이션plantation은 많은 노동자를 꾸준히 투입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공장의 주인들은 전쟁포로를 쓰다가 다른곳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바로 노예입니다.

     

    오래전 오렌지주스의 광고카피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카리브해의 태양 !!"

     

    네 바로 햇빛이 은혜로운 곳 바로 서인도제도입니다.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사이에 위치한 바다)

    이렇게 풍부한 햇빛은 원주민들에게는 축복기도 햇습니다.

    농사가 없이도 먹고 살 걱정이 없는데 굳이 할 이유가 없죠. 먹거리는 자연이 늘 풍부하게 제공해줬으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땅에 중노동을 요구하는 농업이 유입됩니다.

    그것도 외부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서요

     

    후추이야기는 다들 잘 아실겁니다.

     

    콜럼버스는 후추를 찾아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다가 서인도제도에 도달했습니다.

    스페인은 후추를 찾지는 못했지만 서인도제도에서도 뭔가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럽-아메리카의 식물을 서로 옮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사탕수수를 알고 있었죠.  포르투갈의 마데이라제도에서 사탕수수가 재배되고 있었거든요

     

    콜럼버스는 신대륙의 기후를 파악하고 그곳에 사탕수수를 옮겨 재배합니다. 

    (최초로 시작한곳이 아이티입니다.  도미니카공화국 바로 옆)

    그렇게 해서 재배된 사탕수수는 후추대신 막대한 富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에게는 악몽의 시작이 됩니다.

     

    소금과는 달리 설탕은 없어도 되는 기호품이지만 스페인에게는 고려할 필요가 없었고

    스페인의 지배가 이루어지면서 천혜의 땅은 사탕수수밭으로 변해갑니다.

    이러한 스페인의 성공은 유럽의 다른나라에도 알려지면서 서로 앞다퉈서 아메리카대륙의 넓은 땅에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합니다.

     

    원주민으로 노동력을 채웠으나 침략자들이 정복전쟁을 하면서 무자비하게 죽인 원주민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서 노동력에는 한계가 왔습니다.

    더군다나 유럽에서 온 전염병은 면역력이 없었던 원주민들에게는 치명적이었죠

    그러면서 이들은 다른 대륙에서 일할 사람을 강제로 데려옵니다.  바로 노예입니다.

     

    상업에 일찍 눈을 뜬 이들은

    아메리카에서 만든 설탕을 배에 싣고 아프리카로 가서 비싸게 팔고 그 배에 다시 노예를 태워서 돌아옵니다.

    노예들은 이동하는 과정에서 비인간적이고 물과 식량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가혹한 환경에 처해집니다.

    이러한 가혹한 환경에서 죽은 노예들은 그대로 바다로 버려졌고 강한 유전자를 가진 노예들만이

    아메리카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자들이더라도 생전 처음 접하는 가혹한 환경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중노동에 투입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사망하는 노예들은 소모품처럼

    버려졌습니다.

     

    더군다나 이 사이에 사탕수수말고도 중노동이 필요한 농업이 하나 추가됩니다.

     

               목화

    (저 유명한 톰아저씨네 오두막집의 노예가 바로 목화농장의 노예죠.)

     

    유럽인들은 사탕수수와 목화의 재배에 소모품처럼 노예를 썼고 이러한 비극은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되는 시점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 수는 940여만명이라고 전해집니다.

     

    아메리카에서 대규모의 재배와 산업이 가능해지면서 설탕은 유럽에 더 많이 공급됩니다.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홍차도 그 씁쓸한 맛에 각설탕을 하나 넣은 조합으로 큰 인기를 끌죠

    설탕의 공급이 많아지면서 감미료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케이크나 과자등 다른 용도도 등장합니다.

    사치품이었던 설탕이 쉽게 접하는 기호품으로 바뀌어진겁니다.

     

    그리고 태평양의 한 섬이 있습니다.

    바로 하와이입니다.

     

    유럽에서 온 탐험가들은 하와이를 발견하고 하와이의 기후에 착안하여 사탕수수농장을 시작합니다.

    동남아에서 아메리카로 간 사탕수수가 지구를 돌고 돌아서 하와이로 간 것이지요

     

    이후  하와이는 미국의 땅이 되었습니다.

     

    사탕수수는 하와이 각 섬에 야생으로 자라고 있었는데, 1802년 경 중국인이 사탕을 추출하였고, 1825년에는 서인도에서 사탕수주재배업에 종사하던 윌킨슨(John Wikinson)이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사탕수수농장을 설립한 이후에 대규모의 사탕수수 재배농장이 설립되었다.

     

    1850년대 중국에서 하와이로 노동자들이 이동합니다.

    노동자들은  파업도 가능한 신분이었고 환경개선등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60년대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을 대체해서 이동합니다.

    그러나 일본인들도 중국인들처럼 임금인상등을 요구하자

    미국은 우리나라에서도 사람을 데려갑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데려갔던 흑인들도 하와이로 이주시킵니다.

    그러면서 하와이는 다민족이 뒤섞이는 독특한 사회가 형성되죠

    (하와이에는 현재 설탕박물관이 있습니다.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만들었던 역사등이 있다고 하네요)

     

    1903년 최초로 이동한 우리나라사람들은 얼마후 고국에서 치욕적인 일이 벌어진것을 알게 되었고

    하와이에서도 힘든일을 도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하와이에서는 적은돈이라도 벌 수 있었고

    이들은 그렇게 모은 돈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보태는 열의를 보였습니다.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 선생도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 전에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한동안 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와이에서 일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절박함은 이 말에 잘 담겨 있습니다.

     

    돈립 알로하

     

    이 말의 뜻은 당시 하와이·미주 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독립자금 대는 거였죠. 하와이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돈립’ 운동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고요. 독립자금을 댔던 하와이 한인들의 독립을 간절히 바라는 그 마음을 담아 ‘조국 독립아 어서와, 안녕’란 인사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월급으로 성인 남자는 15~17달러, 여자와 아이들은 50센트를 받았습니다. 필요경비를 제외하고 나면 한 달에 3~4달러가 남는데, 매달 1달러 이상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습니다. 1920년대까지 모은 독립자금이 총 300만 달러 규모였습니다."

     

    재외 동포청 김상열 관장 --------

     

    기간한정으로

    1909년 12월~1910년 3월 한인 동포 1595명이 25센트에서 15달러까지 성금을 냈고, 모두 2965달러라고 합니다

    이 중에는 안중근의사의 재판과정에서의 변호사 비용도 있었습니다.

     

    1905년 하와이에 온 이병준 씨는 1908년 친일파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의사를 구제하기 위해 의연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기도 합니다.

    1903년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를, 1905년 10월에는 미국 교민 중 최초로 샌프란시스코 한인공업협회를 조직합니다. 미국 내 최대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모태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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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초기의 하와이이주자들중에는 총각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총각으로 늙어갈수도 없던 그들은 이른바 '사진신부'를 부인으로 맞이합니다.

     

    이들은 배우자를 찾기 위해 고국으로 사진을 보냈고, 그 사진만 보고 하와이로 이주한 여성들이 바로 ‘사진신부’입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중매하는 사람을 통하여 700여 명의 사진신부들이 결혼을 위해 하와이로 떠납니다.
    KBS 다큐온 ‘하와이의 사진신부’(153회, 2022. 8. 19 방영)에 의하면 하와이에서 한인공동체를 만들고 고유한 정체성과 문화를 지켜나갈 수 있었던 것은 사진신부들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교육열도 높았고 생활력이 강하였으며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도 높았습니다. 남성들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고 받은 임금, 여성들은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여 모은 자금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고 증언합니다.

    이 과정에서 웃지못할 일도 벌어졌는데

    오로지 사진만으로 판단해야 했던 당시 원얼굴과 달랐던 경우도 있었던거죠

    정우성인줄 알았는데 옥동자가 등장했다면 ?

    (물론 사람을 외모로만 보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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