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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탕수수와 독립운동
    카테고리 없음 2024. 2. 17. 00:03

    이승만(1875~1965ㆍ건국훈장 대한국민장) 전 대통령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인정받은 업적만큼 많습니다. 하지만 공훈록의 1920년대 부분에 이르면 실패로 끝난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에 대한 짧은 서술 이후 1933년까지 별 내용이 없습니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존립기반이던 외교독립 노선이 흔들리고 임정 세력간의 갈등이 증폭되던 시기. 이 전 대통령은 이 중요한 시간을 하와이에서 자신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關東) 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학살은 임시정부와 미주 한인사회에 널리 펴져 공분을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상하이 독립신문은 ‘적에게 학살된 동포 횡빈(橫濱ㆍ요코하마)에만 1만5천’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지금까지 보도된 바를 종합하면 전부 2만여명이라는 가경할 다수로 산정되더라’(1923년 12월 26일)며 피해자 숫자를 예상합니다.

     

    미주 한인사회 민족단체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기관지 신한민보는 ‘이승만 박사는 장차 대륙에 건너올 예정이라는 데 여행목적은 일본 진재(震災ㆍ지진) 시에 한인 학살사건에 대하여 워싱턴에 전왕하여 미국 국무성에 교섭하여 볼 계획이라는 바’(1923년 12월 20일)라며 대지진 조사를 위해 이승만 전 대통령이 여행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도합니다.

     

     

     

    그러나

     

    이승만 일기에 따르면 1924년 1월 23일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배 마우이호(S.S. MAUI)를 타고 호놀룰루항을 홀로 떠난 이승만 전 대통령은 40여일이 지난 3월 6일에서야 미 동부 볼티모어 항에 입항, 워싱턴에 도착합니다. 2년전 워싱턴 군축회의(태평양회의)를 앞두고 호놀룰루항을 떠날 때는 17일만에 워싱턴에 도착했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1924년 2월 7일 증기선 베네수엘라호(S.S. Venezuela)를 타고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한 그는 미국이 아닌 중앙아메리카 지역인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파나마, 쿠바를 거쳐 3월 6일 볼티모어항에 도착합니다. 자료들에 따르면 생전 처음 중앙아메리카를 방문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배가 정박할 때마다 주변 관광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2월 16일 엘살바도르 항구에서 65㎞ 정도 떨어진 수도 산살바도르를 구경하고, 2월 19일 니카라과 코린토에 정박할 때에는 370㎞ 떨어진 수도 마노구아까지 기차를 타고 가 호텔에 숙박하며 관광합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파나마 운하를 거쳐 중앙아메리카 마지막 정박지인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비용은 바로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을 비롯한 각종교민단의 성금에서 나옵니다. 1922년 6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내각 불신임안을 의결하자 그는 1923년 1월 교민단을 임시정부가 아닌 구미위원부 산하에 두어 임시정부로부터 분리합니다. 여행경비를 보조해준 한인들의 명단 및 액수 등의 기입장부인 ‘이통령 여비 공고서’에 따르면 모두 329명의 하와이 마우이 오하우 섬 거주 한인들이 미화 1,032달러 15센트를 모금하고 이 가운데 인쇄비 등을 제외한 1,015달러 23센트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여행경비로 지급합니다. 1910년대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의 한달 임금이 25달러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이 금액은 노동자 한 명의 40개월치 월급입니다.

     

     

     

    이 내용은 신문기사의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전문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특명받고 떠난 이승만의 기막힌 중남미 유람 (naver.com)

     

    [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특명받고 떠난 이승만의 기막힌 중남미 유람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 미국 본토에 알리려 기획 17일이면 될 여정을 쿠바 등 5개국 40여일… 1000달러 탕진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ㆍ건국훈장 대한국민장) 전 대통령의 독립유공자

    n.news.naver.com

     

     

    이승만은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미국 정치인 더럼 스티븐스를 사살한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의거와 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의거를 두고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킨 살인범이고, 일본과 같은 강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라고 망언을 일삼았다.

     

    당시 그가 변호를 거절한 명분?은 이렇습니다.
     첫째, 평소 무장투쟁은 이대로는 무익하다고 주장해온 것, 둘째 기독교신앙에서 폭력 살인을 거부한다는 것, 셋째 적국 일본의 선전꺼리만 되며 본국 동포를 탄압하는 빌미만 준다는 것, 넷째 지금은 실력양성이 먼저요 무장투쟁은 국제환경이 조성되면 미국과 함께 총력전을 벌이자는 것 등이었다. 
    특히 하버드대 석사 공부를 계속해야하는 현실적 필요성이 가장 큰 이유임은 물론이다.

    (위의 문단은 심지어 뉴데일리에서 가져온겁니다. ㅎㅎ)

     

     

    이러한 사람을 지금 어느동네에서는 국부니 뭐니 하면서 추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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