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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서양
    카테고리 없음 2024. 11. 5. 22:24

     

     

     

    백정에서 의사가 된 박서양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인 박서양(1885~1940)은 백정이라는 신분을 극복하고 당시 촉망받는 의사가 되었다. 졸업 후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던 박서양은 1917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민족교육 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에비슨을 찾아온 백정

    제중원 원장으로 부임해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던 에비슨은 어느 날 결혼식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893년 내한하자마자 치료했던 환자 중 한 명인 박성춘의 요청이었다. 낯선 이국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에비슨의 마음은 흥미로 가득 차 있었다. 결혼식은 절반은 한국식, 절반은 서양식으로 진행되었다. 신랑과 신부는 전통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신부의 얼굴에는 흔히 하는 연지곤지가 없었다. 결혼식을 주재하는 서양인 목사가 신랑과 신부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그들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에비슨을 신랑 아버지인 박성춘이 찾았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박사님, 우리 아이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에비슨은 어리둥절했다. "아니, 인간으로 만들다니?”

    백정에 대한 차별

    박성춘은 백정이었다. 백정은 한국 전통사회에서 인간이 아니었다. 사람들과 섞여 살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치 짐승이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듯이 그들만의 공간에서 살아야 했다. 그들은 거지보다도 더 천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거지는 신분이 높아져서 사람이 될 수 있어도 백정은 그럴 수 없다." 백정에 대한 차별의식은 뿌리 깊었다. 그들이 잡은 동물의 고기를 먹고 살면서도 사람들은 동물의 생명을 빼앗는 그들의 직업을 천시했다.

    백정은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정식으로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지던 신분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신분제 폐지에는 에비슨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노력도 있었다. 그들은 백정들의 불쌍한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백정들 역시 하느님 앞에서는 같은 자식이었고 백정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백정을 양반과 동등하게 대우했다. 나아가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백정들이 성인의 상징인 상투를 틀고 갓을 쓰게 해주십시오."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

    갑오개혁 과정에서 이루어진 신분제 폐지를 통해 백정들은 상투를 틀고 갓을 썼다. 외모에서 그들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에비슨은 그들이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박성춘이 자기 자식을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에비슨이 당황했던 이유이다. 하지만 에비슨은 곧 깨달았다. 박성춘은 자신의 아들이 겉모습만 인간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성숙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길은 교육에 있었다. 박성춘은 자신의 아들이 근대 교육을 통해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 뜻을 이해한 에비슨은 그의 아들을 데리고 제중원으로 돌아왔다. 아들의 이름은 박서양이었다.

    의학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 양반들

    에비슨은 박서양의 심성을 알아보기 위해 처음에는 바닥 청소나 침대 정돈과 같은 허드렛일을 시켰다. 의학공부를 생각하고 제중원에 왔던 박서양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비슨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 에비슨이 의학생으로 모집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양반이었다. 일정한 교육을 이미 이수했기에 수월하게 서양의학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양반들은 의학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길게 기른 손톱을 보여주며 “이는 우리가 절대로 상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에비슨은 양반층에서 의학생 찾는 일을 포기했다. 비록 신분이 낮을지라도 성실하고 험한 일을 즐겨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백정 출신인 박서양은 그런 에비슨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실하고 험한 일 하기를 좋아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고,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

    박서양은 에비슨이 준 일들을 성실하게 해냈다. 에비슨은 만족했다. 에비슨은 그에게 의학서적을 주었다. 본격적인 의학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결혼을 한 박서양에게 학생으로 공부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으로 의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동료 중에는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박서양은 버텨냈다. 힘들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1908년 그는 동료 6명과 함께 연세의대의 전신이자 제중원의학교의 후신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장을 받았다. 한국 정부는 이십여 년 가까이 에비슨 그리고 그의 학생들이 쏟은 노력과 땀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의술개업인허장(오늘날 의사면허)을 주었다. 졸업생들은 길게는 십 년 넘게 이어졌던 학생 생활을 벗어나 이제 공식적으로 의사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개업을 통해 가정을 책임질 수 있게 되었다.

    참다운 인격자

    당시 서양의학은 급속히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다. 특히 서양에서 수입된 약들은 한국인의 복약습관을 바꾸고 있었다.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의 경우 인기가 최고였다. 다른 약들은 무료로 나누어주던 제중원에서도 퀴닌만은 돈을 받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퀴닌을 원했기 때문이다. 제중원에서 서양의학 지식을 배운 민병호는 소화제로 유명한 활명수를 만들었다. 서양의학을 교육하는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박서양과 그의 동료들은 돈방석에 올라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돈을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배운 학문을 후배들에게 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모습을 본 에비슨은 자신이 의사를 넘어 참다운 인격자를 키웠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박서양이 한국사회에서 성장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재학 중 그는 서울에 있는 여러 중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쳤다. 당시 한국은 과학을 갈구하고 있었다. 서양과학이 직수입되던 세브란스는 한국에 과학을 전파하는 수로였고, 박서양은 그 지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못마땅해 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박서양이 천한 백정출신이라며 입방정을 떨었다. 박서양의 대답은 분명했다. "내 몸에 흐르는 오백 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라!"

    숭신학교 설립과 민족교육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에 교수로 부임한 박서양은 처음에는 화학을 가르치다 나중에는 해부학, 외과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의 진로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나타났다. 1971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가 전문학교로 바뀌면서 일제는 까다로운 요구를 내놓았다. 교수진과 관련된 요구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박서양은 국경을 넘어 북간도로 떠났다. 어쩌면 원하지 않은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백정이라는 숙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했듯이 새로운 삶을 만들어나갔다. 그는 북간도에서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지었다. 그가 지은 구세병원은 당시 북간도에서 거의 유일한 서양의료기관이었다. 초등학생들을 위해 숭신학교도 세웠다. 숭신학교는 학부모들의 갹출로 운영되는 한국인의 교육기관이었다. 비록 한국은 아니었지만, 박서양이 거주하던 북간도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한반도보다 더 한국적인 곳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당시 박서양을 주시하던 일본 경찰은 숭신학교가 반일 인사들에 의해 세워졌고, 배일적 경향이 농후하다고 파악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숭신학교 학생들은 시내 중심가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손에는 조선독립을 뜻하는 만세기와 적기가 들려 있었다. 일본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세브란스병원의학교 교수시절의 박서양어넣는 기관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1932년 일본 경찰은 불온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숭신학교를 강제로 폐교했다.

    대한국민회 군사령부 군의

    박서양의 활동은 의료나 교육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직접 독립운동 단체에 참가했는데, 북간도 최대의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였다. 대한국민회는 연길현, 왕청현, 화룡현 등 3개 현에 10개의 지방회와 133개의 지회를 두고 있는 거대한 조직이었다. 한국인들의 자치기구였지만 독립전쟁을 꿈꾸고 있었다. 산하에는 군사조직인 대한국민회 군사령부를 두었다. 1920년에는 봉오동전투로 유명한 홍범도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박서양은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였다.

    늙은 스승과 중년의 제자

    1935년 선교사로서 생활을 마무리하고 캐나다로 귀국하던 에비슨은 도중에 북간도에 들렀다. 자신의 제자였던 박서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헤어진 지 이십여 년 만이었다. 장년과 청년으로 헤어졌던 둘은 이제 노년과 장년이 되어 서로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비슨은 장년이 된 자신의 제자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박서양은 아마 에비슨보다 더 그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에비슨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가 의사로, 교수로 성장하는 일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박서양에게 에비슨은 스승 그 이상의 존재였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면, 에비슨은 그에게 아버지였다.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날, 마침 폭우가 쏟아졌다. 여러 날 계속 내린 비로 길은 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그 길을 걸어 한 사람이 에비슨을 찾아왔다. 박서양의 부인이었다. 다음은 에비슨의 회고이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녀는 우리들의 목에 기대었다. 우리는 박 의사에 관해 물었다. 그녀는 진창길을 통해 자신들을 방문하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 힘들 것을 알고 함께 오려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멀리 떨어진 환자로부터 왕진을 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박 의사는 고민하다가 의사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왕진을 떠났다고 했다.

    당시 에비슨의 나이가 76세, 박서양은 51세였다. 에비슨은 캐나다로 영구귀국하는 중이었다. 캐나다와 한국을 왕복하기 위해서는 배로 몇 주일을 보내야 했다. 만일 그때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한다면, 그들이 이생에서 서로 만날 기회는 없었다. 아마 박서양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서양은 의사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스승이 아니라 자신을 원하는 환자를 찾아갔다. 아마 에비슨은 서운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숙한 '인간'이 된 자신의 제자를 흐뭇한 미소를 띤 채 그려보고 있었을 것이다.

    대의 박서양

    19세기에서 20세기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제중원, 세브란스는 단순한 병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곳을 통해 신분으로 나뉘어 있던 한국은 평등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배워나갔다. 제중원, 세브란스가 있었기에 백정이었던 박서양이 의사로, 교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박서양은 평안할 수 있는 기반을 버리고 북간도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단지 환자만을 치료하는 소의(小)가 아니라 나라를 구하는 대의(大醫)로 성장해나갔다. 그가 제중원, 세브란스를 통해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갔듯이, 그 역시 자신의 조국인 한국을 이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성숙한 국가로 성장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는 박서양의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을 인정하여 그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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