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위해 민족의 건강을 살핀 김창세
1916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를 졸업한 김창세(1893~1934)는 1918년 상하이로 건너가 홍십자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25년 모교 세균학 및 위생학 조교수로 취임했고, 1927년 상하이 위생교육협회의 현장 책임자로 취임, 위생 계몽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저 유명한 안창호의 동서이기도 합니다.
•김 의사(金醫師)가 와서 수치료(治療)를 약 삼십 분간 시행했다(1920. 1. 17.).
•김 의사가 와서 입원을 하라고 하는 까닭에 오후에 입원했다(1920. 2. 1.).
•홍십자병원에 가서 김 의사댁을 방문했다(1920. 2. 23.).
안창호선생의 일기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여기 나오는 김 의사는 안창호의 손아래 동서이자 세브란스연합의학교를 1916년에 졸업한 김창세(金昌世)이다. 평소 과로로 인한 소화기장애와 전신피로, 때로는 심한 두통으로 인해 고통받던 안창호에게 김창세는 언제나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주치의였다. 나아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함께한 동지이기도 했다.
홍십자병원의 한국인 선교사
평안남도 용강이 고향인 김창세는 그곳에 파견된 안식교 의료선교사인 러셀(Riley Russell)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의학을 접하게 되었다. 한국인 의사가 필요했던 안식교는 김창세를 당시 선교부 연합으로 운영되던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입학시켰다. 세브란스에 재학하는 동안에도 그는 방학 때 자신의 고향인 순안의 학생들을 위해 음악이나 영어를 가르쳤다. 김창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다재다능함을 지적하곤 했다. 그는 노래실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어학실력은 발군이었다. 그의 영어 글씨를 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예쁘고 잘 쓰는지 궁금해 했다. 세브란스를 졸업할 때는 답사를 영어로 했는데, 읽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청중을 보고 말했다고 한다.
1916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를 졸업한 김창세는 1918년까지 안식교에서 운영하는 순안교회병원에서 근무하다가, 그해 상하이에 있는 안식교 운영 병원인 홍십자병원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김창세의 신망은 높았다. 1920년 그는 베이징에서 열리는 의료선교사대회에 참가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중국인과 서양인들 사이에서 다대한 신임과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김창세의 상하이 생활은 그에게 독립과 의학, 독립과 건강의 상관성을 고민하게 했다. 그의 고민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그가 홍십자병원의 부원장이 한 건강과 국가흥망의 관계'라는 강연을 통역한 일이다. 이 강연에서 부원장은 당시 서세동점의 국제상황이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다시 말해 "국가흥망이 국민의 건강 여하"에 달려 있다는 주장을 했다. 이 강연은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상하이의 한국인들에게 자신의 건강과 독립의 연관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강연을 통역한 김창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우리의 고통 중 십분지구(十分之九)까지는 능히 예방할 수 있다."는 내용은 공중위생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것으로 김창세의 향후 진로를 예견해주고 있다.
상하이에 거주하는 동안 김창세는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임시정부 산하 대한적십자회가 운영하는 적십자회병원에서 진료활동에 종사하는 동시에 부설 간호원양성소 창립에 참가했다. 당시 적십자회에서 양성하고자 했던 간호사는 의사 업무를 보조하거나 환자를 간호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간호사가 아니었다. "전쟁의 시기에 의사가 부족할 것을 염려하여 간호원으로 하여금 구급에 필요한 의학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그들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1919년 삼일운동 이후에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진행 중이던 독립전쟁에 참여할 의료인이었다. 김창세는 그들을 직접 교육했다.
한국인 최초의 보건학 박사 취득과 모교 취임
홍십자병원에서 진료와 간호사 양성을 통해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펼치던 김창세는 1920년 미국으로 떠났다. 독립을 위한 보다 근본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미국에서 그는 공중위생학이라는 학문을 만났다. 위생환경 개선으로 모든 인류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은 김창세를 감동시켰다. 그에게 공중위생학은 "내 민족을 위하여 죽기까지 봉사할 수 있는 학문이었다. 1923년 공중위생학 연구를 위해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1925년「녹두콩에 대한 화학적, 생물학적 연구」로 위생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보건학 박사의 탄생이었다. 위생 증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식생활 개선이 필요했고, 녹두콩은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단백질원이었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미도 충분했다.
김창세는 박사학위 취득 후 한국으로 귀국했다. 모교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세균학 및 위생학 조교수로 취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세브란스에서 그동안 경험과 연구를 통해 정립한 자신의 공중위생론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이론은 '육체적 민족개조론'으로 요약되었다. 민족이 부흥하기 위해서는, 즉 민족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육체를 개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육체적 민족개조론
김창세에 따르면, 역사상 위대한 민족은 모두 체력이 건장했다. 몽골족, 만주족, 로마인들이 그러했다. 그 당시도 마찬가지였는데, “영, 미, 독, 불은 다른 민족에 비기어 체력이 강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민족이 쇠퇴한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건강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은 같은 동양인인 일본인보다 약했다. 마흔 살만 되어도 새로 공부를 시작하거나 힘이 드는 사업을 시작할 수 없었다. 민족이 쇠퇴한 이유는, 즉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이유는 바로 건강에 있었다.
김창세는 해답도 내놓았다. "나는 조선의 운명이 건강에 달렸다고 봅니다." 민족의 부흥을 위한 다른 방법, 예를 들면 정치적 해방, 교육의 보급, 경제의 발전, 종교의 보급 역시 건강이 보장되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었다. 민족의 건강을 확보하는 일이 민족을 부흥시킬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길이라는 결론이었다. 특히 위생은 민족의 부흥을 위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조목이었다.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건강한 이유는 선천적 체질도 있지만, 대부분은 위생적인 생활을 한다는 데 있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중위생의 향상이었다. 그 향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 교육이었다. "우리나라의 건강상태를 진보시킬 그 제일보는 공중위생교육에 있다."
공중위생의 꿈
김창세는 강의나 연구 이외에 대중 강연에 적극 나섰다. 여성단체가 개최한 강연회에 참가하여 미학력아동을 위한 위생, 어린이 양육에 필요한 위생 등을 강조했다. 나아가 본격적인 공중위생활동을 위해 미국의 록펠러 재단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록펠러 재단은 국제보건사업단을 통해 공중위생사업의 확산을 위한 재정지원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김창세가 졸업한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도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설립된 기관이었다. 김창세는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공중위생사업에 종사할 인재들을 양성하고자 했다. 공중위생가들은 “우리 민족의 위생환경을 개선하여 우리 민족이 건강과 번영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인력이었다.
중국에서 공중위생활동
그러나 김창세의 요청은 수용되지 않았다. 록펠러 재단의 정책상국공립기관이 아닌 사립기관에 대한 지원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927년 그는 한국에서 활동을 정리하고 이미 의료활동을 벌인 경험이 있는 상하이로 떠났다. 상하이에서 김창세는 중화위생교육회성시위생부 주임으로 취임했다. 1927년에서 1928년 사이 중국 25개 도시에서 위생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김창세는 이 운동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각종 모임에서 위생강연을 했고, 아편반대협회가 주관한 아편반대주간에는 라디오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중 일부는 위생사상의 확산을 위해 중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의과대학의 요청으로 전염병 관련 과목을 강의하였으며, 국가의학회에 참여해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비록 모국은 아니었지만 김창세의 위생계몽활동은 중국 국민들에게 "건강은 훌륭한 국가의 토대”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뜻깊었다. 더구나 중국은 외국의 지속적인 침탈 아래 있다는 점에서 '건강 회복을 통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원하는 한국과 지향이 같았다. 김창세의 활동을 바라본 협회 관계자는 그가 “그 자리에 잘 맞는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중국에서 생활은 김창세가 조국인 한국에서 가지지 못했던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국가가 임명하는 공중위생 관리로 활동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27년 국공합작이 결렬된 후 중국의 정세는 더욱 불안정해지고 있었고, 김창세의 활동 기반이었던 중화위생교육회의 활동마저 불가능해졌다. 1930년 김창세는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김창세는 중국 공중위생 향상을 위한 지원 활동을 벌였다. 특히 당시 심각했던 결핵 치료와 관리를 위한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하고자 했다. 중국 항저우에서 시작된 결핵요양소 설립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모금활동도 병행했다. 그는 항저우 서호(西湖)에 있는 결핵요양소 의료책임자이기도 했다. 1931년에는 뉴욕 시장의 주선으로 차이나타운에 의료시설을 만들어 위생국장으로 취임했고. 뉴욕 맨해튼 보이스카우트 보건과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사라진 공중위생의 꿈
김창세의 미국 생활은 화려했다. “한국인으로서 김창세만큼 미국 상류사회에서 교제를 넓게 한 사람은 없었다." 수려한 외모, 유창한 언어, 쾌활한 성격은 그의 외국활동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재산이었다. 그러나 가족 없이 혼자 보내는 미국 생활은 그의 심리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34년 3월 15일 뉴욕 아파트에서 가족과 친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의 자살을 보도한 한 신문은 그가 가족들을 미국으로 데려오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근심스러워했고, 특정인에게 모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고 보도했다.